관광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종종 인상 깊은 여행지/관광지/행사 등에 가면 '여기는 어떤 요소 덕분에 흥미롭고 성공적일까?'라는 궁금증이 몽글몽글 피어올라요. '관광을 논하다'에서는 그런 질문에 대한 제 생각을 나눕니다.
영국 자연사 박물관 Case Study: 박물관이 클럽이 된다?
오늘은 제 최근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의 박물관들이 어떻게 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제목에서 언급했듯이 영국 런던에 있는 자연사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의 사례를 가져왔습니다. 그곳에서 일주일 좀 전에 친구들과 진짜 신나게 놀고 왔는데, 한창 노는 와중에 ‘엇!’ 하고 전구 모양이 머리 위에 그려졌거든요. 우리나라 박물관들도 자연사박물관의 아이디어를 빌려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부터 풀어보도록 할게요!!
런던 자연사 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 소개
런던 자연사 박물관은 South Kensington (사우스 켄싱턴) 역에 있습니다. Paddington (패딩턴) 영화에도 등장했던 곳인데 정말 어마어마하게 크답니다. 자연사박물관은 총 4개의 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류, 곤충, 공룡, 지질학, 인체 등 정말 그 분류 및 범위가 엄청나요. 저도 몇 번 가봤었지만, 아직도 다 구경해보지 못했네요.
일반 전시는 무료입장이고 영국 및 유럽의 초등학교 아이들이 견학으로 많이 오는 곳입니다. 전시품 보유 규모 외에 여느 박물관처럼 평범(?)해 보이는 이 자연사박물관을 오늘 제가 굳이 사례로 가져온 이유는 뭘까요? 바로 자연사박물관은 ‘어린 자녀를 둔 가족’, ‘현장 체험 답사를 위한 학교’를 주 타깃층으로 꽉 잡고 있을 뿐 아니라, 성인에게도 성공적으로 매력을 어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박물관들은 주로 월요일이 휴관 일인 대신 평일 중 며칠은 비교적 늦은 시간까지 개장하는 때도 있죠. 덕분에 주말과 야간 개장이 있는 저녁엔 직장인들도 방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에 반해 영국의 자연사박물관은 크리스마스 같은 큰 기념일이 아닌 한 휴관일 없이 매일 개장하지만, 오후 5.50이면 폐장합니다. 이 경우 직장인들 같은 경우엔 박물관에 방문하고 싶다면 주말 나들이객들과 함께 뒤섞여 구경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또 사실 ‘어려서 호기심 가득할 때 이미 다녀와 봤을 추억의 장소인 자연사박물관을 성인들이 더 이상 얼마나 가고 싶어 하겠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굳이 평일 늦은 시간까지 개장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연사박물관이 또 다른 큰 타깃 그룹인 성인 방문객들을 버릴 순 없지요!! 그래서 자연사박물관은 특별 프로그램 구성을 매우 똑똑하게 풀어내어 성인층 집객은 물론 추가 수입까지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제가 무릎을 탁 치고 유레카를 외친 부분입니다. ㅋㅋㅋ :D 제가 직접 경험하고 와서 든 생각을 바탕으로, 영국 자연사박물관이 성공적인 마케팅을 거둘 수 있는 이유를 네 가지 정도로 공유해드리겠습니다. :)
영국 자연사박물관 특별 프로그램의 성공 원인
1. 확실한 STP (Segmentation / Targeting / Positioning)
자연사박물관의 주요 방문객 구성을 여러 가지 기준으로 나눠볼 수 있겠으나 저는 간략하게 두 그룹으로 나눠 생각해봤습니다. 어린이와 어린이를 동반한 성인 관람객, 그리고 어린이를 동반하지 않은 성인 관람객입니다. (국제 관광객은 열외로 했습니다). 후자 그룹의 경우 대개 낮엔 직장 또는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자연사박물관에서도 낮에는 아이들(과 부모들), 학교 견학 등의 목적으로 프로그램을 기획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어린이를 동반하지 않은 성인 관람객은 다른 주요 타깃의 행동 패턴과 완전히 다르므로 일반적으로는 이 두 그룹을 다 만족하게 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돌려 생각해보면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각 타깃에 잘 접근한다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는 자연사박물관이 이를 매우 성공적으로 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자연사박물관은 어린이를 동반한 고객들의 활동 시간과 일반 성인 관람객들의 활동 시간이 다른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야간 특별 이벤트를 기획했습니다. (어린이 고객을 타깃으로 한 야간 이벤트도 있긴 하지만, 이는 기존 시장 내 product line extension의 개념으로 간주했습니다). 종류도 다양한데, 제가 최근에 직접 참석했던 것은 After-School Club for Grown-ups & Silent Disco at the Natural History Museum이었습니다.
이름이 말해주듯 오로지 만 18세 이상만을 타깃으로 한 행사인데요. 오후 5.50에 폐장을 하고 한 시간여 정도 준비시간을 거친 뒤, 첫 번째 이벤트의 티켓 홀더들은 7시가 살짝 지나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행사는 첫 번째 행사가 10시 정도에 끝나고 바로 이어져 새벽 1시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성인들만 있어서 본관 중앙 홀에서는 알코올과 안줏거리도 팔았고요. 특히 두 번째 행사 같은 경우는 사일런트 디스코 (디제잉을 듣기 위해 헤드폰을 끼고 춤을 춥니다ㅎㅎ) 행사였는데요, '불금'을 보내고자 하는 직장인들에게 평소에 가던 펍과 클럽과는 조금 다른 특별한 경험을 자연사박물관이 제공해준 것입니다. 자연사박물관이 목표로 했던 두 타깃의 주요 활동시간과 관심사가 명확히 다른 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낮에는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키워주는 교육 공간으로, 저녁에는 성인들의 파티 공간으로 활용된 것입니다.
2. 박물관 기존의 이미지와 상반되는 이미지를 통해 관심 유도
첫 번째로 든 이유의 마무리 문장의 마지막 문구만 보면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박물관이 클럽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저는 평소에 박물관이라 하면 다소 정적인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곤 했습니다. 유리창 너머 전시된 유물들은 바라만 볼 수 있는 대상이고 관람 시에는 정숙해야 하는 것이 보통 이미지가 아닐까 싶은데요. 하지만 자연사박물관은 이 행사에 박물관의 전형적인 인상과 상반된 이미지 (역동적이고 북적북적한 클럽)를 들여와 서브 타깃 (성인 관람객)에게 이색적인 night-out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행사에서 술과 안주도 팔고 클럽 장소로 사용되었지만, 근본적으로 간과해서는 안 될 기본 규칙을 넘지 않는 선에서 진행됐습니다. 박물관 관리 및 운영에 최대한 영향이 미치지 않도록 사일런트 디스코의 형태로 행사를 기획했지요. 디제이들의 선곡은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쓰고 있던 헤드폰을 통해서만 나왔기 때문에, 박물관 자체에 퍼지는 소음은 간혹가다 있던 떼창(!)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습니다. 술과 안주는 중앙홀에서만 팔았고 주기적으로 행사장을 청소해주는 분도 있었습니다. 첫 번째 행사는 지상층의 일부 관으로 제한되었고, 클럽은 메인 홀에서만 이뤄졌기 때문에 어느 정도 통제가 수월했을 것입니다. '교육'이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박물관이 'Night Out'을 위해 가는 공간이 된다 했을 때의 그 신선함이 자연사박물관의 이번 이벤트의 인기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 유행하는 문화와 잘 접목한 콘텐츠
최근 영국 곳곳에서 Slient Disco (사일런트 디스코)를 기획, 운영해오는 거로 보아, 이 문화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런던 자연사박물관에서의 사일런트 디스코는, 사일런트 디스코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장소로서, 사일런트 디스코를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사일런트 디스코 자체에 대한 호기심과 특별한 장소라는 두 가지 매력이 함께 다가오지 않았을까요? 어느 쪽이든 불금에 트렌디하면서도 특별한 추억을 남기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매우 잘 통했다고 생각합니다.
4. 박물관 고유 콘텐츠 특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독창적인 프로그램 기획
앞서 언급한 세 가지도 다 각각 또 같이 중요한 사항들이지만, 사실 이 항목이 가장 핵심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유행을 잘 따랐고 박물관의 기존의 이미지와 다른 인상을 주었다 하더라도, 자연사박물관이 가진 그 특징을 놓치면 다른 행사와 차별화될 것이 없을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앞서 제시한 요소들 자체로도, 또 서로 간의 유기적인 연결도 매우 중요하지만, 이번 이벤트가 큰 만족감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자연사박물관만이 제공할 수 있는 테마와 프로그램이 잘 녹아들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자연사박물관의 큰 경쟁력 요소는, 많은 양에 더해 참여 유도형인 콘텐츠에 있습니다. 자연사박물관에는 유리창 안에 전시된 것들도 있지만, 직접 만져볼 수 있고 체험해 볼 수 있는 코너가 곳곳에 다양하게 있어 평소에도 어린이들에게 간접 체험의 기회를 많이 줍니다. 어른 관람객을 위한 이번 특별 야간 이벤트에서도 이 부분을 활용했는데요,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난 프로그램은 단연 공룡관 프로그램이었다 생각합니다.
공룡관엔 다양한 공룡이 골격의 형태로 동선 곳곳에 전시되어 있어 평소에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인기 있는 전시관입니다. 그런데 이 행사에서는 그 재미를 더하여, 전시관의 조명이 꺼진 상태에서 손전등을 들고 다니면서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가 탐험가가 된 듯, 또 마치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지요. 전시된 것들이 모두 모형이고 함께 관람하는 다른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몰입도는 상당히 높았습니다.
또한, 박물관 안에서 술래잡기하거나 퀴즈를 풀어보는 등의 활동은 박물관-관람객, 관람객-관람객 간의 교류를 활성화해주었습니다. 허용된 범위 내에서 전시관 어딘가에 숨은 술래 (또 다른 관람객)를 찾으려 하고, 박물관 곳곳을 누비면서 퀴즈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고 하면서 관람객들은 자연스럽게 박물관에서 '놀게' 됩니다. 자연사박물관이 워낙 넓어서 자칫 잘못하면 일찍 흥미를 잃을 수도 있는데, 게임 요소를 삽입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고 오히려 참여도를 더 끌어올렸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박물관-당사자-다른 관람객들 간의 교류작용은 첫 번째 행사의 마무리를 위해 나온 라이온킹의 주제가 (Circle of Life)로 극대화되었습니다. 복도를 따라 자연사박물관과 그 이상 잘 어울릴 수 없는 노래가 흘러나오자 모든 사람이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행사 마무리로서 단연 최고의 기획 포인트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부 프로그램들은 사실 평소였다면 어른들이 굳이 나서서 참여하진 않았을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연사박물관 측의 전반적인 기획력, venue로서 그 자체의 특별한 분위기, 그리고 다른 관람객들이 행사를 즐기는 모습에 함께 이입하면서, 어린아이 또는 학생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어린 시절까지 통틀어서도 박물관을 이렇게까지 제대로 즐기다 온 것은 처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런 감상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자연사박물관의 콘텐츠가 탄탄한 바탕으로 작용하여 축제 전반적으로 그 독창성을 지켜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6월 초에 났던 국내 기사 중에 더 많은 관람객 방문을 유도하기 위해 국내 다수 박물관의 정기휴관 일을 없앤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관람객들에게 더 높은 접근성을 제공하기 위해서 좋은 조치인 듯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각 박물관이 가진 큰 테마와 콘텐츠를 잘 살려서 독창적인 행사도 고려해보면 어떨까요? 박물관별로 가지고 있는 특징을 잘 연구한 뒤 타깃 대상에 대한 명확한 이해, 그리고 철저한 준비를 통해서 국내 박물관에서도 돈을 내고서라도 꼭 한번 가보고 싶게 만드는 기획물이 나오기를 기대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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